대부분의 사람들은 봄이 남쪽에서부터 올라온다고 말하지만, 때때로 봄은 동해의 훈풍을 타고 강릉의 담벼락 밑에서 먼저 기척을 보인다.
입춘을 갓 지난 2월 7일 토요일은 행복한 걸음들의 모임(약칭 행발모)으로 강릉 바우길 탐방을 가는 날이다.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수원역에서 수인·분당선으로 환승하여 죽전역에서 내렸다. 죽전역에 내리니 최근 지속된 강추위에 몹시 추웠다. 추위 속에서도 탑승 약속 장소인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죽전간이역에 도착하였다. 잠시 후 서울에서 출발한 관광버스에 ‘행발모 강릉바우길’이란 표시를 하고 도착한 버스에 합류하여 강릉으로 향하였다.
◯ 인내와 성숙의 상징 오죽헌에서 만난 검은 대나무
신사임당과 율곡 이이 선생의 생가로 유명한 강릉 오죽헌 마당에서 줄기가 검은 대나무 오죽을 보았다. 검은 대나무(오죽) 숲이 둘러싸고 있어 오죽헌이란 이름이 유래됐단다.
검은 줄기가 겨울 공기 속에서 더 또렷했다. 바람은 지나갔지만 오죽은 흔들릴 뿐, 흐트러지지 않았다. 속을 비운 채 하늘을 향해 곧게 서 있는 모습에서 말보다 깊은 침묵을 배웠다. 강인함이란, 소리 없이 자기 자리를 지키는 일임을 오죽은 그렇게 서서 가르치고 있었다.
일행은 오죽헌에서의 아쉬움을 남기고 잘 단장된 바우길을 걸으며 겨울의 정서를 만끽하였다. 경포호를 지나게 되었다. 경포호는 강릉의 대표 호수로, 백사장과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경포대 주변에 위치하였다. 호수 둘레길 산책로를 조금 지나니 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잔디밭이 보였다. 일행은 각자 싸 온 김밥과 컵라면 등으로 점심을 서로 나누며 야외 소풍을 하였다.
◯ 선교장과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담장 안에서 본 봄의 전령 백매화와 홍매화
이어지는 산책 도중에 조선 후기 김시습(매월당)의 생가로 복원된 전통 한옥 선교장과 허균·허난설헌 기념관을 탐방하였다. 이곳에서 하얀 매화와 붉은 홍매화를 보았다.
보통 매화의 개화 시기보다 이른 개화(조매, 早梅)가 기후 변화나 강릉 특유의 미세기후(Microclimate)에 의한 것 같다. 강릉의 기후가 태백산맥이 찬 바람을 막아 주고 동해의 온난한 공기가 유입되는 영동 지방 특유의 기온 덕분에 남도만큼이나 일찍 꽃이 핀 것이다.
강릉의 매화는 겨울과 봄의 경계를 가장 먼저 열어 주는 목본성 화목으로, 아직 땅의 온기가 덜 오른 2월 초부터 꽃눈을 깨우며 계절 변화를 알리는 대표적인 선구 개화종이다. 매화나무(Prunus mume)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 소교목으로, 내한성이 비교적 강해 혹한기에도 이듬해 이른 시기에 꽃을 피게 된다. 가장 큰 특징은 잎보다 꽃이 먼저 피는 습성으로, 강릉처럼 해양성 기후의 영향을 받는 동해안 지역에서는 2월에도 일찍 형성된 화아가 저온 요구량을 채운 뒤 단기간의 기온 상승에 반응해 개화를 시작한 것이다.
특히 허균·허난설헌 기념공원 일대는 남향·배수 양호·바람이 비교적 잘 빠지는 환경 덕분에 토양 온도 회복이 빨라, 같은 위도권 내에서도 개화가 빠른 경향을 보인다. 매화는 기본적으로 꽃 색과 꽃받침 색에 따라 백매·청매·홍매 등으로 구분하며, 붉은 꽃잎을 갖는 계통을 홍매화, 흰 꽃잎에 붉은 꽃받침을 가진 계통을 백매화라 부른다.
홍매화는 안토시아닌 색소 발현이 강해 꽃잎 전체가 선명한 적홍색 내지 분홍빛을 띠며, 백매화는 청백색 또는 순백색의 꽃잎이 가지에 단정하게 붙어 미세한 구조와 수술 배열이 선명히 드러나고, 홍매에 비해 색채 자극은 약하지만 ‘고요한 고결함’이 강조된다.
동양 문화와 상징성 매화는 난초·국화·대나무와 함께 사군자로 분류되며, 동양 유교 문화권에서 군자의 기개를 상징하는 대표 수종이다. 사대부들은 설한풍에 먼저 꽃을 여는 매화의 내한성과 곧은 가지에서 고난을 견디는 불굴의 절개를 읽어 냈고, 눈 속에 선명히 드러난 꽃눈을 ‘고결·청렴·인내’의 표상으로 형상화해 서화와 시문 속에 반복적으로 도입해 왔다.
특히 다섯 장의 꽃잎은 장수·부귀·강녕·유호덕·선종의 오복을 상징한다는 해석과 함께, 매난국죽 구도 속에서 선비가 지향해야 할 완전한 인격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매화를 보고 난 일행은 강문해변을 지나 다시 버스로 정동진으로 이동하여 안목해변에서 출발하는 해안 산책로인 바다부채길을 따라 심곡항에서 탐방 일정을 마무리하였다.
호모사피엔스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행복은 주관적 안녕이라고 했다. 추위 속에서도 지인들과 함께 걸으며 살을 에듯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기어코 꽃망울을 터뜨린 홍매화의 붉은 뺨과, 서리처럼 하얀 백매화의 고결한 자태를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오죽(烏竹)의 서걱거리는 소리는 마치 이 어린 꽃들을 격려하는 낮은 저음의 합창 같았지요. 2월의 강릉, 흑과 백 그리고 선명한 홍색이 어우러진 그 짧고도 강렬한 찰나의 순간을 보며 행복을 만끽한 하루였다. 우리 모두 행복한 걷기에 참여하여 모든 분들도 각자의 주관적 안녕을 통해 행복을 이어 가자!
댓글이 없습니다.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