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박사의 생활의 발견] 정의

문재익 전 강남대 교수(문학박사)
문학박사 문재익(칼럼니스트)

정의의 한자正義를 풀어 해석하면, ‘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자유와 정의의 진리)’이며 영어단어 ‘justice’공정성, 정당성, 재판, 사법의 의미로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두가 지켜야 할 강제하는 규범인 법()’이다. 사실 정의는 선()도 악()도 아닌, 이 둘을 포함하는 중립적 개념으로, 정의를 바탕으로 세워진 법()은 누군가에게는 악법(惡法) 일 수도 있으며, 법치국가(法治國家)에서 정의의 마지막 수호자는 법관(法官)이다. 그리고 올바른 사회를 위해, ‘사회정의, 정의구현(正義具現:justice served), 정의사회구현, 공정사회, 사법정의라는 용어가 쓰이는데, 우리나라에서 정의를 외치는 대표적 단체로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으로 사회적 목소리를 내는 가톨릭 사제(司祭:주교, 신부)들의 단체이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한국사회의 경제정의와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평화적 시민운동을 전개하는 단체이다. 그밖에 정의의 의미로는 바른 의의(意義:어떤 사실이나 행위 따위가 갖는 중요성)’가 있고, 철학에서는 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道理: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바른 길)’,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의 의미이다. 정의의 유의어에는 공정(公正:공평하고 올바름), 도리, ()가 있고, 반의어인 불의(不義)의리, 도의(道義), 정의에 어긋남으로 유의어에는 부당, 부정, 부정의가 있다. 그런데 정의와 불의도 따지고 보면 결국은 ()과 악()’의 범주(範疇)에 속해 있으며, 양심(良心)은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儀式)’인 것이다.

정의에 대한 명사들의 명언들로 재() 조명(照明) 해 보면, 대표적으로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정치인, 종교인, 언론인, 사회운동가, 월간 사상계의 창간인 장준하 선생님의 명언,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를 꿈꾼다.’가 있는데, 그 당시 어두웠던 정치현실을 말하는 것 같다. 다음으로 평화는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닌, 마음의 상태, 자비, 신뢰, 정의에서 비롯된다.’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의 말이고, 비슷한 맥락에서 정의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평온으로부터 온다.’ 미국의 유명 여성 TV드라마작가 겸 프로듀서 바바라 홀의 말이며, ‘모든 위대한 것들은 단순하며 많은 것들이 한 단어로 표현될 수 있다. 그것은 자유, 정의, 명예, 의무, 자비, 희망이다.’ 영국 수상 윈스턴 처칠의 말인데, 정의란 그렇게 거창(巨創) 한 말이 아니라는 것으로, 무엇보다도 내면(內面), 즉 내 안의 마음의 평화를 의미하는 말인 것 같다. 또한 진리처럼 들리는 명언으로는, ‘인간은 부당해도 신은 공정하다. 결국 정의가 승리한다.’ 미국 시인, 소설가, 번역가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우 말은 우리의 사필귀정(事必歸正)과 그 결()을 같이하는 말인 것 같고, ‘정의의 손에는 칼이 있을 수 없다.’ 고대 로마의 풍자시인 유베날리스의 말은 무력으로 정의를 세우려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말이 조금도 사리에 맞지 않음)이라는 말 같으며, ‘정의는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선량함은 더욱 넓은 공간을 점령한다.’ 고대 그리스 아테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로 선()함이 정의보다 상위적 포용의 개념으로, ‘()한 곳에는 이미 정의가 세워져 있거나 정의가 실현되어져 있다는 말인 것 같다. 그리고 덧붙여 사람이 서로 해치지 않게 하는 것이 정의의 역할이다.’ 고대 로마 정치가 키케로의 말이고, ‘정의는 미덕(美德)의 으뜸이다. 정의의 뒷받침이 없는 용기는 무용지물(無用之物)이며, 만인(萬人)이 모두 다 의롭다면 용기는 필요 없다.’ 스파르타의 왕 이 게실라우스의 말이며, ‘정의로운 자의 찬란한 행위는 육신의 고향인 흙속에 묻히지 않고 살아남는다.’ 그리스의 서정시인 핀다로스의 말로, 정의로운 사람의 이름은 죽어서도 어디를 가나 살아 드날린다.’는 말인 것 같다.

성경에서는 정의보다는 불의에 관한 하나님 말씀에 무게를 두어 여러 구절이 나온다. 불의(injustice, wickedness, sin)옳지 않은 일, 사람의 도리에서 벗어난 일로 규정하고 물리적 폭력과 정신적 탄압으로 타인에게 심신(心身)의 상처를 안기거나 재산상 손해를 입히는 행위(잠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에서 벗어나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행위, 하나님을 떠난 일체(一切)의 일(로마서, 사도행전, 고린도 전, 후서)’, 일명 ()’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특히 로마서에는 선으로 악한 불의를 이기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범인(凡人)들은 쉽게 이해도 안 갈뿐더러 따르기도 쉽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는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원불교에서 삼학(三學)이란 정신수양(精神修養), 사리연구(事理硏究:지식을 넘어 지혜까지 성장하는 것), 작업취사(作業取捨:취하고 버림)이며, 부처의 인격에 이르도록 하는 세 가지 길로, 대표적 원불교의 수행교리로 삼학을 병진(竝進:둘 이상이 나란히 함께 나아감)해서 삼학의 공덕인 삼대력(三大力:수양, 연구, 취사)을 얻고 보면 자신의 마음을 부처와 같이 사용할 줄 아는 자유인이 되며,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삼학의 세 번째인 작업취사는 실생활 속에서 정의는 용맹 있게 취하고 불의는 용맹 있게 버리는 공부로 사회생활에서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행위를 효과적으로 활용(活用)하자는 것에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

사실 정의와 불의라는 것이 그 말을 주장하거나 부르짖는 사람의 입장이나 이해득실(利害得失)에 따라 좌지우지(左之右之)될 수 있다. 서로 반대편에서 자신만이 정의이고 상대편은 불의라고 주장하고, 설득할 수 있는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진리는 생명존중, 더불어 잘 사는 나라,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고이다. 잘잘못을 따져보는 것,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가 거의 반반으로 분열되어 있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며 개개인 모두가 책임의식을 느껴야 하고, 특히 위정자(爲政者)들의 각성(覺醒)과 의식전환을 국민 모두가 염원(念願)하고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으며, 또한 일부 사람들이긴 하지만 이념적 편향, 그리고 계층 간 대립이 더 이상 극점으로 치닫지 말아야 하겠다.’는 염원(念願) 또한 간절한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한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의와 불의, 다시 말해 선과 악을 저지르는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에 대해 격론(激論)을 벌여왔다. 그러나 그 같은 팽팽한 격론에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 있다. 인간은 유전자가 제일 먼저이고, 그다음이 환경, 그리고 교육이다. 대체로 선량한 집안에서 태어나면 선량하고, 악한 집안에서 태어나면 악한 것이다. 한 마디로 생물학적 개념으로 종자론(種子論)이다. 환경적 요소라는 것은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인데, 교육이란 선과 악을 가려보는 눈을 갖게 하는 것이지만, 가정교육은 타고난 그대로, 분위기 자체가 선()하고 악()할 테니, 별 큰 의미가 없고, 그렇다면 학교교육인데 조금은 변화될지 몰라도 그마저도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선한 사람은 불의를 저지르려 해도 결국은 선하게 돌아오고, 악한사람은 정의를 지키고, 실현하려 해도 불의, 악을 선택하고 말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성(本性), 천성(天性)이라는 말이 우리 인간세계에서 회자(膾炙)되고 있지 않은가? 결국 사회에서 성공과 행복하려면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한다. 타고난 선인(善人)인지, 악인(惡人)인지? 다시 말해 정의로운 사람인지, 불의를 저지를 사람인지? 상대를 의심하고, 시험해 보는 경미(輕微) 한 것부터 극악무도(極惡無道)한 언행(言行)에 이르기까지 모두 대상이 될 수 있고, 되어져야 한다. 상급자든, 하급자든, 특히 친구나 배우자의 경우, 결국 종국(終局)에는 내게도 그리하고, 때론 악인은 악행을 동참(同參)하거나 동조(同調)할 것을 요구하게 되어 있다. 그러다 보면 본의(本意) 아니게 휩쓸려 내 삶이 낭패(狼狽)를 볼 수도 있다. 사람을 제대로 볼 줄 아는, 한 마디로 함께 할 사람인지, 함께 해서는 안 될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는 삶의 지혜’, 살아가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특히 경영자, 운영자는 최우선으로, 결국은 사업, 기업의 성패는 사람에 달려있다.

우리는 보통 정의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아마도 정의 실현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이나 정치 사상가들의 주된 고민거리 중 하나여 왔고, 하나일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는 한 개인과 사회전체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데 필수적 요소이기 때문이다. 정의 실현은 공정성과 각자에게 그의 몫을 돌려주는 평등성을 중심으로 되어야 하는 것으로, 역사와 사회운동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추구되어 왔고, 그리고 앞으로도 그리하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정의 실현은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며, 지연되면 실현되지 못한 것과 같고,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정의 실현에 대한 구체적 사례들은 어떤 것인가? 첫 번째, ‘법적 정의의 실현: 사회의 규칙과 법을 통해 실현되는 것으로 법이 공정하고 일관되게 적용될 때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법의 제정과정이 투명하고 민주적이어야 하며, 법 집행이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두 번째, ‘경제적 정의의 실현: 부와 자원의 공정한 분배를 의미하며,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며,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을 포함하며, 무엇보다도 다양한 정책과 제도가 필요하다. 세 번째, ‘사회적 정의의 실현: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평등하게 대우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인종, 성별, 종교, 성적 지향 등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이 존엄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을 포함한다. 마지막으로, 정의 실현을 위한 한 개인의 역할’: 단순히 제도나 정책만으로는 실현될 수가 없는 것으로, 타인과 관계에서 공정하고 정직하게 행동하고, 집회, 토론,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적 참여와 연대를 통하며, 무엇보다도 내적 성장을 이루는 자아성찰(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자신의 기여도)’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상으로 정의는 공정하고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핵심적인 요소로, 정의는 단순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닌 우리 모두가 함께 실행 및 실천하고 실현시켜 나아가야 할 현실적인 목표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리 사회 도처에서 정의 실현이 제대로 이루지고 있느냐에 대한 물음이 생긴다. 일단은 모두 긍정적으로 답()하고 싶다. 단 하나 아쉬움이 남는 것은 법 집행에 대한 것이다. 바로 사회지도층, 특권층에 대해 일반 국민들로 하여금 의구심(疑懼心)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의 실현의 최후 보루(堡壘)인 사법부, 정의의 마지막 수호자인 법관들의 양심에 따른 공정한 법 집행이 이루어져 사법 정의가 실현되기를 대다수의 국민들이 바라는 바일 것이다. 특히 여기서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혹여 정치 편향적 판결만은 제발 말아 달라.’는 것이다.

끝으로 세계적 특히, 우리나라에서 더 유명한 두 권의 책을 읽을 것을 권고하는 것으로, 글을 맺으려 한다. 하나는, 미국 하버드대 정치철학교수 마이클 샌델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와 다른 하나는, 영국 셰필드대학 인류지리학과교수 대니얼 돌링이 쓴 불의란 무엇인가?, 두 권의 책 모두 딱딱하고 지루하지만 인내하고 읽어 나가다 보면 정의와 불의라는 관점에서 우리 사회의 문제점과 해결책들이 무엇인지를 나름대로 도출(導出:어떤 생각이나 결론 따위를 이끌어 냄)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確信)에 거듭 확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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