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世上萬事(36)] 올여름 더위 팔기

이종훈 국장
이종훈 국장

새해가 지나고 정월대보름이 엿새 앞으로 다가왔다. 휴대전화 문자에는 대보름맞이 오곡밥 세트를 예약 중이라는 안내가 뜬다. 정월대보름(正月大보름). 한 해 첫 보름달이 가장 둥글게 차오르는 밤이다. 둥글다는 건 모나지 않다는 뜻이고, 가득 찼다는 건 더는 보태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날, 먼저 내놓았다. 걱정도, 더위도, 액운도. “내 더위 사가라어린 시절 그 외침은 장난처럼 가벼웠지만, 실은 삶을 버티기 위한 소박한 의식이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시절, 새벽을 깨우던 할머니의 손길이 떠오른다. 졸린 눈을 비비며 부럼을 깨물었다. ‘하고 부서지던 피땅콩 껍데기. 부럼(부스럼을 막는다는 뜻)에는 병 없이 지내라는 바람이 담겨 있었다. 깨문 피땅콩을 밖으로 내던지며 내 부스럼 사가라고 외쳤다. 이어 마시던 귀밝이술 한 잔. 좋은 소식은 또렷이 듣고, 나쁜 말은 흘려보내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깨문 껍데기를 마당 밖으로 던지던 그 순간, 우리는 어쩌면 두려움도 함께 던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모두 할머니의 가르침이었다.

태어난 시골에서는 아이들이 밥을 슬쩍 훔쳐 먹었다. 서로 다 아는 행동이었지만, ()을 나눈다는 이름 아래 이웃집을 오갔다. 얼굴에 밀가루를 묻히고 웃음으로 하얘지던 마을. 대보름은 잠시 무질서가 허락된 날이었다. 규칙보다 웃음이 앞섰고, 체면보다 장난이 먼저였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밤이 되면 논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뾰족한 못과 망치로 깡통에 구멍을 뚫고, 잘게 쪼갠 나무를 넣어 불을 붙였다. 철사에 매단 깡통을 힘껏 돌리면 불씨가 원을 그렸다. ‘훨훨타오르며 공기를 가르던 그 소리. 불이 밝게 돌수록 이상하게 마음도 시원했다. 해충을 태운다고 배웠지만, 사실은 우리 속 불안이 더 많이 타들어 간 건 아닐까. 달빛 아래서 불꽃은 원을 그렸고, 아이들의 숨은 고르게 이어졌다.

풍속은 사라진 게 아니라 모양을 바꿨다. 연천군은 오는 32일 전곡리 유적 유휴부지에서 2회 연천 정월대보름 민속한마당을 연다. 전통 연 시연과 풍물 공연, 달집태우기까지 준비된다고 한다. 주민들이 소원지를 매달고 불을 밝히며 액을 태우는 장면은 LED 쥐불놀이 체험 속에서도 여전히 옛 불꽃의 기억을 품고 있을 것이다. 빛의 방식은 달라졌지만, 바람의 내용은 다르지 않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여전히 더위를 팔아야 할 것들이 많다. 여름 더위만이 아니다. 마음속 열기, 쉽게 가라앉지 않는 분노, 설명되지 않는 불안. 그것을 먼저 내놓는 용기야말로 대보름의 지혜였는지 모른다.

올해 보름달이 뜨는 밤, 나는 연천 행사장에 나가볼 생각이다. 달집에 소원 하나 매달고, 마음속 더위를 조금 일찍 팔고 오려 한다. “내 더위 사가라그 한마디가 다시 입안에서 맴돈다. 어쩌면 더위를 파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가볍게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달은 매해 같은 자리에서 차오르지만, 우리는 매해 조금씩 달라진다. 그래서 의식이 필요하다. 잠시 멈춰 서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밤. 불꽃이 원을 그리듯 삶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라면서. 더위를 팔 수 있다면 좋겠지만, 어쩌면 팔아야 할 건 우리 마음일지도 모른다. 올여름 시원하게 지나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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