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한 채가 불타고 있다. 지붕은 이미 화염에 먹혔고, 검은 연기는 하늘로 치솟는다. 창문은 뜨거운 숨을 토해내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봐도 지금 이 장면의 핵심은 단순하다. “불이 났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집 앞에 선 두 사람의 얼굴은 정작 불길보다 서로를 향해 있다. 한쪽은 소화기를 움켜쥐고 물줄기를 뿜고 있고, 다른 한쪽은 설계도를 들고 손가락질한다. 급한 불을 끄자는 쪽과, 애초에 이 집이 왜 이렇게 지어졌는지부터 따지자는 쪽. 둘 다 자기 말이 맞다고 목에 핏대를 세운다. 이상한 건, 둘 다 집을 보고 있는 듯하면서도 사실은 서로를 보고 있다는 점이다.
이 장면은 우스꽝스럽지만 낯설지 않다. 경제가 흔들릴 때마다 정치는 늘 이런 식이었다.
숫자 하나가 나오면 누구는 그것을 비상벨로 읽고, 누구는 그것을 상대의 책임 추궁서로 읽는다. 경고등은 하나인데 해석은 둘이고, 체온계는 하나인데 처방전은 두 장이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다. 성장률 전망이 낮아졌다는 숫자는 차갑게 놓여 있는데, 그 숫자를 둘러싼 말들은 뜨겁다. 한쪽은 “지금 돈을 풀어 숨통부터 틔워야 한다”고 하고, 다른 한쪽은 “그렇게 임시방편만 하니 체질이 더 약해진다”고 맞선다. 얼핏 보면 경제 논쟁 같지만, 조금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이건 해법의 경쟁이면서 동시에 해석의 점령전이다. 누가 숫자를 먼저 자기 말로 번역하느냐, 누가 위기를 자기 논리의 증거로 가져가느냐의 싸움이다.
그래서 더 기묘하다. 불타는 집 앞에서 소화기를 든 사람도, 설계도를 든 사람도 완전히 틀렸다고 하긴 어렵다. 불이 났으면 일단 끄는 게 맞다. 그러나 같은 자리에 불이 자꾸 난다면 배선과 구조를 다시 봐야 하는 것도 맞다.
문제는 정치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둘을 서로의 머리 위로 내리치는 몽둥이처럼 쓴다는 데 있다. 불을 끄자고 외치는 목소리는 금세 “당신은 불을 키운 사람”이라는 비난으로 바뀌고, 구조를 고치자고 외치는 논리는 곧바로 “당신은 지금 타는 집도 못 본 척한다”는 공격으로 바뀐다. 그렇게 되면 해법은 사라지고 자세만 남는다. 내용은 증발하고 표정만 커진다. 결국 불 앞에 선 두 사람은 화재 진압팀이 아니라, 화재를 배경으로 자기 정당성을 연설하는 배우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경제라는 건 원래 숫자로 말하는 세계다. 성장률, 물가, 금리, 수출, 유가. 하나하나가 건조하고 무심한 지표들이다. 그런데 정치가 그 숫자를 입에 물면 전혀 다른 생물이 된다. 같은 1.7이라는 숫자도 누구 입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지금 당장 추경해야 한다”는 절박함이 되기도 하고, “그러니까 추경식 사고가 문제”라는 비판이 되기도 한다. 숫자는 변하지 않았는데, 숫자에 붙는 표정과 손짓과 목소리는 달라진다.
그리고 그때부터 숫자는 사실이 아니라 무기가 된다. 경제 지표가 국민의 삶을 설명하는 수치가 아니라, 상대를 찌르기 위한 창끝이 된다. 참 묘하다. 민생은 늘 숫자 아래 깔려 있는데, 정치는 늘 숫자 위에 올라타 있다.
이 만평이 겨누는 칼끝도 바로 거기에 있다. 소화기를 든 손이든, 설계도를 든 손이든, 결국 중요한 것은 정말 집을 살릴 생각이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장면을 보면 집보다 논리가 먼저고, 불길보다 체면이 먼저다. 한쪽은 급한 처방을 말하며 속도를 내세우고, 다른 한쪽은 근본 대책을 말하며 원칙을 내세운다. 속도와 원칙, 둘 다 필요한 말인데 정치의 입에 들어가면 서로를 지우는 말이 된다. 속도는 포퓰리즘이라는 비난을 받고, 원칙은 무능과 지연이라는 공격을 받는다. 그렇게 둘이 싸우는 동안, 정작 집 안에서 살던 사람들, 그러니까 서민과 자영업자와 중소기업과 시장의 약한 고리들은 연기부터 마신다. 정치는 처방을 놓고 싸우지만, 현실은 지체의 비용을 먼저 낸다.
그래서 이 장면을 오래 보고 있으면 웃음이 조금 서늘해진다. 우리는 지금 경제 해법의 토론을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한 책임 회피의 기술을 보고 있는 걸까. 불은 분명히 집에서 났는데, 왜 사람들은 자꾸 상대방 입에서만 연기를 찾으려 하는가. 집이 타는 소리보다 논평문 문장이 더 또렷하게 들리는 정치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나와야 할 것이 소화기인지 설계도인지조차 합의하지 못하는 풍경, 그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정치의 민낯은 아닐까.
더 얄궂은 건 이런 장면이 결국 선거의 언어로 번역된다는 점이다. 여당은 “우리는 지금 필요한 응급 처치를 하려 한다”고 말할 것이고, 야당은 “우리는 이런 집을 만든 구조 자체를 고치려 한다”고 맞설 것이다. 둘 다 선명하다. 둘 다 그럴듯하다. 둘 다 표를 의식한다. 민생이라는 단어는 가장 많이 불리지만, 정작 민생은 가장 늦게 도착한다. 선거가 가까워질수록 숫자는 더 자주 호출되고, 위기는 더 자주 인용되고, 해법은 더 자주 구호가 된다. 경제는 점점 복잡해지는데, 정치는 점점 더 쉬운 말로 갈라선다. 그 쉬운 말들이 박수는 받을지 몰라도, 불길까지 잡아줄지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결국 이 한 컷은 묻는다. 같은 숫자를 보고도 이렇게 다른 세상을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과연 누가 불을 보고 있고 누가 카메라를 보고 있는가. 집은 타고 있는데, 사람들은 진화보다 해석에서 이기려 한다. 불길은 말이 없는데, 사람들은 불보다 더 뜨겁게 떠든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는 장면은 이것이다. 집은 아직도 타고 있고, 정치는 그 불빛으로 서로의 얼굴만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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