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지워진 숫자’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하나

허찬회 기자
허찬회 국장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사용기한이 지난 KF94 마스크를 변조해 유통한 사건을 적발했다. 폐기 대상 마스크 82000장에 대해 사용기한을 자그마치 3년 늘었고, 제조번호는 사라졌다. 사실관계는 명확하다. 그런데도 이 사건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치 않다.

지금은 마스크가 많이 쓰이는 계절 봄이다. 미세먼지가 짙어지는 계절이다. 코로나19 시기를 거치면서 마스크는 선택이 아니라 생활의 일부분이 됐다. 사람들은 외출 전 포장지를 한번 더 본다. 사용기한, 제조일자. 숫자를 확인하면 괜찮다고 여긴다. 그 숫자는 정보가 아니라 약속이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그 약속을 무너뜨렸다. 숫자는 지워졌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다시 찍혔다. 폐기돼야 할 물량은 창고를 거쳐 다시 시장으로 나왔다. 그렇게 정상 제품이 됐다. 소비자는 그 과정을 알 수 없다. 포장지에 남은 숫자만 믿는다.

그래서 더 묻게 된다. 그 숫자조차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물건을 골라야 하는가. 이걸 단순한 일탈로만 보긴 어렵다. 폐기 물량이 외부로 나가고, 표시가 바뀌고, 다시 유통되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쳤다. 그 과정 어디에선가 관리가 멈췄다. 제조번호까지 지워진 정황은 단순 실수로 보기 힘들다.

더 불편한 건 이 점이다. 이런 방식이 가능했다는 사실 자체다. 마스크만의 문제일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는 다른 물건들도 같은 구조 안에 놓여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표시가 아니라 과정이 흔들리면, 신뢰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시장은 결국 믿음으로 움직인다. 숫자는 그 믿음을 눈에 보이게 만든 최소한의 장치다. 그런데 이번 사건은 그 장치가 얼마나 쉽게 지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다. 그 숫자를 지키는 과정이다. 이번 사건이 남긴 건 적발된 물량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믿어왔던 기준이 흔들렸다는 사실이다. 그걸 다시 세우지 못하면, 다음 숫자도 언제든 지워질게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절대적으로 신뢰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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