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은 높고 나무 잎은 붉어진다. 파란 하늘 아래 붉게 물든 단풍잎이 흔들리는 우리나라 절기상 스물네 절기 가운데 열여덟 번째인 상강(霜降)이다. 상강이라는 말은 이름 그대로 서리가 내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이 시기에는 바람이 서늘해지고 풀잎 위에 흰 서리가 앉기 시작한다. 상강은 가을의 끝자락을 알리는 순간이자 겨울이 다가오는 길목이다.
우리조상이 살아오던 예전 농경사회에서 상강은 단순한 기후 변화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추수를 마무리하고 곡간을 채우는 마지막 시기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세시풍속집인 '동국세시기'에는 '상강 무렵이면 들판의 곡식이 다 거둬지고, 장터에는 곡물이 풍성하다'는 기록이 전한다. 요즘 시장과 오일장에 가면 가을 추수물들이 많은 게 이 때문이다. 당연한 이치지만 그렇다. 이때부터 농촌 마을은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내고, 조상께 제를 올리며 한 해 농사의 끝을 감사했다. 이처럼 농민들에게 상강은 곡식과 삶을 함께 정리하는 시기였다.
풍수지리에서는 상강을 양의 기운이 물러가고 음의 기운이 자리를 잡는 절기로 해석한다. 여름과 가을 내내 밖으로 뻗던 에너지가 땅속과 나무속으로 스며들며 만물이 겨울잠을 준비하는 시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상강을 사람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면을 단단히 해야 하는 때로 여겼다. 겉으로는 단풍이 마지막 빛을 발하며 화려함을 남기지만, 속으로는 고요히 겨울을 준비하는 순간인 셈이다.
상강과 관련된 속담도 여럿 전해진다. “상강 지나면 낟알이 제 구실한다”라는 속담은 곡식이 상강 무렵에 수확되어야 알이 차고 질이 좋다는 뜻을 담고 있다. “상강이 지나면 고등어가 살이 오른다”라는 말은 찬 기운이 돌면서 해산물이 맛을 더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또한 “상강에 거둔 곡식은 이듬해까지 간다”라는 속담은 늦게까지 잘 여문 곡식일수록 저장성이 뛰어나다는 지혜를 전한다. 이 속담들은 절기가 단순히 달력 속 날짜가 아니라 생활의 나침반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상강 무렵에는 다양한 풍속이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김장 준비다. 서리가 내려야 무와 배추가 단단해지고 단맛이 배어들어 김치가 깊은 맛을 낸다고 믿었다. 또한 상강은 사냥과 낚시의 철이기도 했다. 맑고 차가운 날씨 속에 고기는 살이 오르고 들짐승도 살이 찌는 시기였기 때문에 옛사람들은 상강 무렵 사냥과 낚시를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중요한 풍속으로 여겼다. 불교에서는 상강 즈음에 가을 불공을 드리며 한 해를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았고, 유교 사회에서는 상강제(霜降祭)라는 제례를 지내 조상의 은덕을 기렸다.
현대인에게 상강은 체감으로만 느껴지는 절기일 뿐 달력에서 특별히 표시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그 의미는 남아 있다. 오늘날 기상학에서도 상강 무렵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지고 첫 서리와 첫 얼음이 관측된다. 농업은 기계화되었지만 농민들은 여전히 상강을 기점으로 농사 달력을 매기며, 바다에서는 상강 무렵 제철 생선을 손꼽는다. 무엇보다 상강은 우리에게 멈춤과 성찰의 시간을 권유한다. 봄과 여름에 쏟아낸 에너지를 거두어들이고 겨울의 고요를 맞을 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바쁜 일상 속에서 상강은 계절의 작은 메모처럼 다가와 “이제는 한 해를 정리할 때가 되었다”고 말하며, “겨울을 대비하라”고 일깨워준다.
사진 속 가을 하늘 아래 물드는 나뭇잎은 상강의 정취를 그대로 보여준다. 자연은 말없이 절기를 가르쳐주고, 사람은 그 신호를 읽으며 살아왔다. 세상만사는 결국 자연의 흐름을 거스를 수 없는 법이다. 상강의 서리가 내리는 순간 우리는 또 한 해의 끝자락을 건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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