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논리에 파묻힌 청년 주거권…'주거 난민' 해소가 본질이 돼야

오기춘 기자
오기춘 기자

 

'집'이란 이름의 기형적 '금융 상품'

대한민국은 이미 집이 부족한 나라가 아니다. 주택보급률은 오래전 100%를 돌파했고 지방의 일부 시·군은 이미 집보다 사람이 적다.

그런데도 지방선거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쏟아낸 공약은 여전히 ‘부동산 개발’과 ‘공급 확대’라는 해묵은 서사뿐이다. 정작 청년들은 살인적인 월세방을 전전하고 신혼부부는 평생을 저당 잡힐 대출 잔액 앞에서 결혼 자체를 포기한다.

“집은 넘쳐나는데 왜 국민의 삶은 더 불안해졌는가.” 이 모순적인 질문에 정치는 여전히 한쪽 눈을 감아 왔다.

문제는 공급의 총량이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집’은 더 이상 인간이 존엄을 지키며 살아가는 ‘주거 공간’이 아니다. 거대 금융 시스템이 설계한 가장 정교하고 탐욕스러운 ‘핵심 금융 상품’일 뿐이다.

지금 부동산 시장을 지배하는 것은 철저한 아파트 공화국의 논리다. 정부의 정책도, 은행의 대출도, 메이저 언론의 보도도 오직 아파트 가격이라는 단 하나의 잣대로만 움직인다.

특히 매주 발표되는 ‘KB 아파트 평균 시세’는 어느 순간 대한민국 국민 삶의 현실을 대표하는 절대적인 신탁(神託)처럼 소비되고 있다. 수억,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서울 중심의 평균값이 과연 어느 곳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가.

언론이 이 기만적인 ‘평균의 함정’을 부추기며 아파트값을 국민의 표준인 양 받아쓰는 사이, 빌라와 단독주택, 지방 소멸 지역의 폐가 문제, 그리고 청년들의 가혹한 주거 난민 현실은 번지르르한 숫자 뒤로 철저히 매몰된다.

국민 삶의 기준은 마땅히 개인의 소득과 삶의 질이어야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서열화된 아파트 평당 가격이 인간의 계급을 규정하는 기괴한 주객전도가 벌어지고 있다.

이 기형적인 구조를 완성하는 몸통은 다름 아닌 금융 권력이다. 은행은 아파트 대출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억 원씩 내어준다. 시세가 규격화되어 있고 거래가에 담보 가치를 쥐어짜기 가장 쉽기 때문이다.

반면 청년들이나 서민들이 주로 찾는 빌라나 다세대주택, 대안적 주거 공간에는 철저하리만치 보수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문턱을 높인다. 결국 시민들은 자신이 살고 싶은 집이 아니라 ‘은행이 돈을 빌려주는 집’쪽으로 등 떠밀린다. 대한민국 전체가 거대 금융 자본의 배를 불리기 위해 집값을 떠받치는 거대한 담보물로 전락한 꼴이다.

금융감독원 역시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금융감독의 목적이 고작 은행의 건전성 지표나 맞추고 연체율 수치나 관리하는 데 머문다면 국민의 생존권은 언제나 담보 가치라는 자본의 계산서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국내 금융 당국은 지난 수십 년간 아파트 담보대출 중심의 안전한 ‘땅짚고 헤엄치기’식 영업을 묵인해 왔다. 그 결과가 바로 시한폭탄처럼 부풀어 오른 가계부채와 사회에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파산 직전의 빚더미를 안아야 하는 청년 세대의 비극이다.

그런데도 지난 시간 관료와 정치권은 매번 무능하게도 같은 주문만 외운다. “더 공급하겠다.”

본질을 회피하는 비겁한 면피다. 지금 대한민국에 부족한 것은 시멘트 덩어리의 숫자가 아니다. 미쳐 날뛰는 주거 비용 평등의 실현이다. 주거에 대한 아파트 공급 확대가 만병통치약이었다면 국민의 주거 불안은 진작에 청산됐어야 했다.

지금 당장 멈춰야 할 것은 맹목적인 아파트 공급 경쟁이 아니다. 국가 경제 전체가 집값 상승이라는 마약에 의존하게 만든 기득권 금융 구조의 해체다.

집은 원래 사람이 살기 위해 지어졌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서 집은 사람의 숨결이 아니라 자본의 탐욕과 금융의 이자가 먼저 살고 있다. 이 약탈적 구조를 방치한다면, 머지않아 국가 시스템 자체가 거대 금융 자본에 완전히 잠식당해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이제 금융 시스템이 아닌 인간의 주거 시스템을 복원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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